국악가수 이영우
바다를 만들고 산을 만들어, 다시 노래로 돌아온 사람
열아홉
무대의 조명이 켜지기도 전에 막이 내려버렸다. 뮤지컬 단원으로 출발했지만, 재정난이라는 이름의 칼바람에 공연 한 번 못 올리고 극단은 문을 닫았다. 청춘은 허공에 붕 떴다.
무대는 사라졌는데, 심장은 여전히 박자를 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 그는 방향을 틀었다. 바다였다. 한국해양구조대 창설 멤버로 구본정 단장과 함께 현장을 뛰었다. 1987년부터 광안리, 해운대. 파도가 리듬이었고, 바람이 화성이었다. 스킨스쿠버, 윈드서핑. 물속에서 숨을 참고, 수면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그는 배웠다.
인생은 잠수와 같다.
깊이 들어가야 진짜를 본다.
음성을 거쳐 원주 부론면 정산리. 흙을 일구며 영우농장을 세웠다. 속초와 일산을 오가며 내린 뿌리였다.
그러다 쓰러졌다. 급성 뇌경색.
삶이 한순간에 무음이 되었다.
병상에서 그는 다시 생각했다. “삼이 좋다더라.”
그 말이 씨앗이 되었다. 그래서 2000년, 산으로 갔다. 정선 임계리에서 산양삼(장뇌삼)을 시작했다. 몸을 살리기 위해 시작한 산양삼(장뇌삼)이, 어느새 삶을 살리는 철학이 되었다. 흙을 만지며 그는 알았다. 사람도 삼처럼 오래 묵어야 향이 깊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노래.
인터넷 라이브 방송이라는 작은 창을 열었다. say 방송으로 시작된 소박한 마이크. 화면은 작았지만 울림은 컸다. 노래는 다시 그를 불렀다.
김성봉 작곡, 김종구 시인의 가사.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편곡을 거쳐 탄생한 곡 《달래야》. 그 노래는 그의 인생과 닮았다.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풀잎처럼, 꺾여도 향을 남기는 소리.
이영우의 무대는 화려함보다 체온이 있다. 전국을 돌며 공연 활동을 이어갔고, 스스로 무대를 기획해 동료 가수들에게 설 자리를 내어주었다. 스타가 되기보다, 사람을 남기는 길을 택했다.
그는 말한다.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통 공간을 만들었다. 나이 들어갈수록 더 많이 듣고, 더 깊이 배웠다. 국악, 전통가요, 대중가요, 라이브 협업. 장르를 넘나드는 콜라보레이션 속에서 인생의 장단을 맞추었다.
그리고 만남.
전통가요 가수 정다온.
음악을 피붙이처럼 끌어안고 가는 그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만나 보니 더 깊었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서로의 결을 알아본 두 사람은 음악의 깊은 골짜기로 함께 들어갔다.
그 길은 경쟁이 아니라 조화였다.
각자의 소리가 포개질 때, 삶의 시너지가 수십 배로 증폭되었다.
이영우의 인생은 직선이 아니다.
바다를 건너 산을 키우고, 병상을 지나 무대로 돌아온 곡선이다.
그는 아직도 노래한다.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늙어가기 위해.
음악으로 건강해지고, 음악으로 사람을 만나고, 음악으로 짚시처럼 자유롭게 길을 걷기 위해.
그의 노래에는 파도 소리가 있고, 흙 냄새가 있고, 다시 살아난 심장의 박동이 있다.
그래서 이영우의 무대는 공연이 아니라 생존의 증언이다.
오늘도 그는 묻는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 어떤 장단에 춤추고 있습니까?”
뮤직칼럼이스트 김학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