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9월 3일 성명서에서 혁명은 대개 거대한 적과 싸우면서 시작된다. 프랑스혁명에는 왕정이 있었고, 러시아혁명에는 차르 체제가 있었다. 독재와 특권, 불평등과 억압이라는 분명한 상대가 있을 때 사람들은 서로의 차이를 뒤로 미룰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하고 나면 문제가 달라진다.
외부의 적이 사라진 자리에서 내부의 차이가 커지기 시작한다.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에게 묻는다. 누가 더 혁명적인가. 누가 더 순수한가. 누가 혁명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가. 역사의 비극은 대개 여기에서 시작됐다.
혁명의 적을 무너뜨린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충분히 혁명적인가?”
처음 혁명가들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왕정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 그런데 혁명 이후 질문은 바뀌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진짜 혁명가인가?”
혁명의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과거를 평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정치를 보기 위해서다.
최근 민주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을 보고 있으면 오래된 혁명사의 질문들이 다시 떠오른다.
누가 노무현의 적통인가.
누가 김대중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았는가.
누가 이재명을 가장 어려울 때 지켰는가.
누가 더 진보적인가.
누가 더 개혁적인가.
누가 더 민주적인가.
이 질문들이 전혀 의미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에는 노선이 필요하다. 정당에는 역사와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선 논쟁이 어느 순간부터 자격 심사로 바뀌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신은 진짜 민주당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노무현의 정신을 배신했다.”
“당신은 이재명을 어려울 때 지키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보다 덜 개혁적이다.”
이러한 언어가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순간 정치적 논쟁은 정책과 미래를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순수성 경쟁이 된다.
최근 유시민의 문제제기도 이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은 민주개혁 진영이 어렵게 만들어온 정치적 자산을 중도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부분이 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놓였을 때 거리로 나왔던 시민들이 있었다.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다. 정권을 획득했다고 해서 그 시민들의 열망과 요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경계해야 할 지점도 있다.
혁명의 정신을 지키자고 말하는 것과 누가 혁명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지를 판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의 바깥에서 혁명의 본래 약속이 희석되고 있다고 경고하는 지식인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혁명의 기억을 지키는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혁명의 정통성을 판정하는 심판자가 되기 시작하면, 역사에서 반복됐던 순수성의 정치가 다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전체가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혁명을 완성하는 일보다 서로의 혁명성을 심사하기 시작할 때 혁명은 쇠퇴한다.
오늘 민주당 역시 같은 유혹 앞에 있다.
노무현의 적통은 누구인가.
김대중의 후계자는 누구인가.
이재명을 누가 가장 충실하게 지켰는가.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질문들은 대부분 과거를 향하고 있다. 지금 집권 여당이 국민 앞에서 대답해야 할 질문은 다른 곳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바꿀 것인가.
부동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청년들이 다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극심한 자산 격차와 불평등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 검찰과 사법, 언론과 의회의 권력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 지역소멸과 저출생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AI와 기후 위기의 시대에 노동과 복지, 교육과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 이것이 집권 정당의 질문이어야 한다.
정당이 과거의 정통성을 놓고 싸우기 시작하면 국민의 삶은 정치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김대중을 가장 잘 계승하는 방법은 김대중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을 계승하는 방법 역시 누가 노무현과 더 가까웠는지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도 이재명에 대한 충성 경쟁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를 성공시키는 것이다. 민생을 개선하고, 불평등을 줄이고,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시민의 삶을 실제로 바꾸어내는 것이다.
혁명 이후의 정치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재와 싸울 때는 적이 분명하다. 그러나 승리한 뒤에는 자신과 다른 동지를 인정해야 한다. 권력을 나누어야 한다. 패배한 사람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자신과 다른 노선을 배신으로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과거의 공로가 아니라 미래의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이것은 혁명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다. 우리 시민사회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시민운동도 오래 지속되면 자신의 역사와 공로를 갖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누가 더 오래 싸웠는가”, “누가 더 순수한가”, “누가 진짜 시민사회를 대표하는가”라는 질문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누구도 시민을 독점할 수 없다.
누구도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독점할 수 없다. 촛불을 먼저 든 사람이 촛불의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다음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더 순수한가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사람을 함께 가게 할 수 있는가. 누가 더 진보적인가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사람의 삶을 실제로 진전시킬 수 있는가. 누가 민주주의의 적통인가가 아니라, 누가 민주주의를 더 넓힐 것인가.
혁명은 권력을 바꾸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혁명의 마지막 시험은 오히려 승리한 뒤에 찾아온다.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는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동지를 적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혁명의 이름이 아니라 시민의 삶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의 역사는 우리에게 오래된 경고를 남긴다.
혁명은 적을 쓰러뜨릴 때보다, 승리한 동지들이 서로를 적으로 만들기 시작할 때 더 위험해진다. 지금 민주당도, 민주진보진영도, 시민사회도 이 오래된 역사의 경고 앞에 서 있다. 이제 물어야 한다. 누가 더 옳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디로 함께 갈 것인가...

Reported by
김홍이/대표기자





